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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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황제 데키우스와 헤레니아 에트루실라의 아들로, 220년에서 230년 사이에 태어났다. 249년 데키우스가 황제가 되면서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칭호를 받았고, 250년에는 카이사르, 251년에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데키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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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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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씨우스 데키우스 |
제위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퀸투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씨우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
아버지 | 데키우스 |
어머니 | 헤렌니아 에트루스키야 |
통치 | |
작위 | 로마 황제 |
통치 기간 | 251년 5월 – 6월 |
선임자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후임자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섭정 | 데키우스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227년경 |
사망일 | 251년 6월경 |
사망 장소 | 아브리투스 |
매장 장소 | 알 수 없음 |
2. 생애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데키우스 황제와 헤레니아 에트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출생년도는 220년에서 230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250년 호스틸리안과 함께 카이사르 (칭호)|카이사르la 칭호를 받았고, 251년에는 아우구스투스 (칭호)|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되어 아버지와 공동 황제가 되었으며, 집정관직도 맡았다.
249년부터 고트족은 크니바 왕의 지휘 아래 다뉴브 속주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고트족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했고,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베로에 전투에서 패배한 후,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크니바의 매복에 걸려 아버지 데키우스와 함께 전사했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죽음 이후, 군대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퀸투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는 로마의 장군이자 훗날 황제가 된 데키우스와 그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실라의 아들이었다. 그의 출생일은 220년에서 230년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날짜는 확인하기 어렵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251년에 황제로 선포되었을 당시 어린 소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그의 동전에 묘사된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데키우스는 판노니아와 모에시아 속주에서 군대를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249년 9월, 자신의 군대에 의해 필리푸스 아랍에 대항하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데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필리푸스에 대항했고, 249년 9월 이탈리아 베로나 근처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필리푸스가 살해되자, 로마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그에게 황제 트라야누스를 기리는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을 수여했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그의 남동생 호스틸리안은 250년에 카이사르la로 승격되었다. 251년 5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되어 데키우스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또한 251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2. 2. 군사 경력과 황제 즉위
퀸투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메시우스 데키우스는 로마의 장군이자 훗날 황제가 된 데키우스와 그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실라의 아들이었다. 그의 출생일은 220년에서 230년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는다.데키우스는 판노니아와 모에시아 속주에서 군대를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249년 9월에 그의 군대에 의해 필리푸스 아랍에 대항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필리푸스에 대항하여 군대를 이끌었고, 249년 9월 이탈리아 베로나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져 필리푸스가 살해되었다. 이후 로마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트라야누스 황제를 기리는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을 수여했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그의 동생 호스틸리안은 250년에 카이사르la로 승격되었고, 251년 5월에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되어 데키우스 아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또한 251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249년, 고트족은 크니바 왕의 지휘 아래 거대한 군대로 로마 제국의 다뉴브 속주를 침략했다. 그들은 두 개의 열로 나뉘어 한 열은 다키아를 공격했고, 다른 군대는 7만 명으로 구성되어 크니바가 직접 이끌며 모에시아를 침략했다. 크니바의 군대는 다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필리포폴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고, 다른 그룹은 노바에로 진군했다. 크니바는 모에시아의 총독이자 미래의 황제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의해 노바에 포위가 저지되자 남쪽으로 이동하여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이 무렵 침략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고,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호스틸리안은 로마에 남았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선봉대와 함께 먼저 파견되었고, 데키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의 본대가 뒤따랐다.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기습하여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패배 이후, 크니바는 헤무스 몬스(발칸 산맥)를 넘어 도망쳤고, 필리포폴리스에서 그의 다른 군대와 합류했다. 그 후 크니바는 헤무스 몬스 기슭의 작은 도시 베로에 근처에서 베로에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군대를 매복했다.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져 모에시아로 도망쳤으며,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군대를 재정비했다. 크니바는 그 후 필리포폴리스로 돌아갔고, 트라키아의 로마 총독인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251년 봄에 반격을 시작하여 고트족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크니바는 251년 6월 아브리투스(오늘날 불가리아의 라즈그라드) 근처에서 그들을 매복했다. 이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모두 사망했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너무 대담하게 공격을 밀어붙였다"고만 기록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그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commilito가 아니라 멀리서 군대를 지휘하는 imperatorla로 행동했다고 명시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데키우스에게 전해진 후, 그는 한 생명의 손실은 전투에서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며 위로를 거부하고 전투를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살해되었다. 데키우스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불분명하지만, 그가 전투 중 commilitola로, 전투에서 후퇴하는 동안, 또는 imperatorla로 복무하는 동안 살해되었음에 동의한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예비군은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를 구하기 위해 제때 본군을 지원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배신 때문인지 불운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사망하고 로마 군대의 대부분이 그들과 함께 사망한 후, 남은 군대는 즉시 모에시아의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선출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크니바와 굴욕적인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어, 그들이 포로와 전리품을 유지하도록 허용하여 평화를 확보했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헤레니아 에트루실라를 ''아우구스타''(황후)로 유지하고, 호스틸리안을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시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자신과 함께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호스틸리안은 251년 11월에 역병이나 살인으로 사망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되었다.
2. 3. 고트족과의 전쟁과 죽음
249년, 고트족은 크니바 왕의 지휘 아래 거대한 군대로 로마 제국의 다뉴브 속주를 침략했다. 그들은 두 개의 열로 나뉘어 한 열은 다키아를 공격했고, 다른 군대는 7만 명으로 구성되어 크니바가 직접 이끌며 모에시아를 침략했다. 크니바의 군대는 다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필리포폴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고, 다른 그룹은 노바에로 진군했다. 크니바는 모에시아의 총독이자 미래의 황제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의해 노바에 포위를 저지당했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이 무렵 침략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고,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호스틸리안은 로마에 남았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선봉대와 함께 먼저 파견되었고, 데키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의 본대가 뒤따랐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기습하여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끔찍한 패배 이후, 크니바는 헤무스 몬스(발칸 산맥)를 넘어 도망쳤고, 필리포폴리스에서 다른 군대와 합류했다. 그 후 크니바는 헤무스 몬스 기슭의 작은 도시 베로카 근처에서 벌어진 베로에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군대를 매복했다.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뿔뿔이 흩어져 모에시아로 도망쳤으며,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군대를 재정비했다. 크니바는 그 후 필리포폴리스로 돌아갔고, 트라키아의 로마 총독인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251년 봄에 반격을 시작하여 고트족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크니바는 251년 6월 아브리투스(오늘날 불가리아의 라즈그라드) 근처에서 그들을 매복했다. 이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모두 사망했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이 사건의 주요 출처인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너무 대담하게 공격을 밀어붙였다"고만 말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그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commilitola가 아니라 멀리서 군대를 지휘하는 imperatorla로 행동했다고 명시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데키우스에게 전해진 후, 그는 한 생명의 손실은 전투에서 사소한 일이라고 말하며 위로를 거부하고 전투를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살해되었다. 데키우스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불분명하지만, 그가 전투 중 commilitola로, 전투에서 후퇴하는 동안, 또는 imperatorla로 복무하는 동안 살해되었음에 동의한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예비군은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를 구하기 위해 제때 본군을 지원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배신 때문인지 불운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사망하고 로마 군대의 대부분이 그들과 함께 사망한 후, 남은 군대는 즉시 모에시아의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선출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크니바와 굴욕적인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어, 그들이 포로와 전리품을 유지하도록 허용하여 평화를 확보했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헤레니아 에트루실라를 ''아우구스타''(황후)로 유지하고, 호스틸리안을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시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자신과 함께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호스틸리안은 251년 11월에 역병이나 살인으로 사망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la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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